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을 읽다가 일본어 번역에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파울러가 아내 헬렌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답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I can see you marrying after a drink too many.
하야카와 epi 문고의 다나카 세이지로 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술을 한 번 마시기만 해도 아무하고나 결혼할 당신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a drink too many는 ‘술을 한 번 마셨다’는 뜻이 아니다. ‘한 잔을 지나치게 더 마셨다’, 즉 ‘과음한 기세로’라는 표현이다. 문면에 가깝게 옮기면 “당신이라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기세로 결혼해 버릴 것 같군요” 정도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눈에 걸리는 것은 ‘아무하고나’다. 원문에는 이에 직접 대응하는 말이 없다. 문맥상 파울러가 결혼하려는 상대는 프엉이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에서는 그 상대가 불특정한 누군가로 넓어졌다.
‘아무하고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 한 문장만 비교하면 원문에서 꽤 멀리 나간 번역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렌의 편지 전체를 읽어 보면 ‘아무하고나’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헬렌은 파울러가 혼자서는 견디지 못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안다. 그는 예전에도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그 여자를 잃으면 인생이 끝나기라도 할 듯 말했다. 이제는 프엉을 잃으면 “죽음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헬렌은 그의 감정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의심하는 것은 그 진심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다.
파울러에게 프엉은 사랑하는 여자인 동시에 늙음과 외로움을 멀리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장면에서 혼자 늙어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심지어 같은 방에 여자가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상대라도 혼자인 것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까지 한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헬렌에게 결혼하겠다는 말은 프엉을 평생 아끼겠다는 결심이라기보다 외로움과 귀국에 대한 두려움에서 도망치려는 충동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번역자가 ‘아무하고나’에 그런 냉정한 인물평을 담으려 했다면 나름의 맥락은 있다.
그렇다고 해도 번역문에서 일어난 변화는 작지 않다. 원문에 있던 술의 비유는 흐려지고, 그 자리에 헬렌의 판단이 놓인다. 영어에서는 독자가 앞뒤 문맥을 통해 읽어 내야 했던 뜻이 일본어에서는 미리 드러난다. 여백이 단정으로 바뀐 셈이다.
이것이 의식적인 의역이었는지, 관용 표현을 잘못 이해한 결과였는지는 번역문만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이 차이를 ‘오역’이라는 한마디로 끝내면 헬렌이 파울러의 무엇을 꿰뚫어 보았는가라는 더 흥미로운 문제까지 보이지 않게 된다.
‘I miss you’는 일본어로 옮길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I miss you.라는 흔한 말조차 갑자기 까다롭게 느껴진다.
일본어로 옮길 방법은 많다. ‘보고 싶어’, ‘외로워’, ‘네가 그리워’, ‘곁에 있어 줬으면 해’, ‘네가 없어서 외로웠어’. 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보고 싶어’는 앞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외로워’는 상대의 부재보다 말하는 사람의 상태에 무게가 실린다. ‘그리워’는 아름답지만 일상 대화에서는 조금 강하고 문학적으로 들린다. ‘곁에 있어 줬으면 해’에는 상대를 향한 요구가 섞인다.
I miss you.에는 상대가 여기 없다는 사실, 그 부재를 느끼는 마음, 외로움, 애정, 다시 만나고 싶은 바람이 풀리지 않은 채 함께 들어 있다. 연인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쓸 수 있다. 절실한 고백이 될 수도 있고, 오랜만에 연락한 사람에게 건네는 가벼운 인사가 될 수도 있다.
일본어에는 이만큼 넓은 뜻과 일상성을 동시에 지닌 하나의 정해진 표현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는 ‘보고 싶었어’일 수 있다. 멀리 떨어진 연인에게는 ‘네가 없어서 외로워’가 된다.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면 ‘네가 그리워’나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가 될 것이다. 영어에서는 같은 세 단어지만 일본어에서는 관계와 거리, 흐른 시간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번역한다는 것은 결정한다는 것
I miss you.를 ‘보고 싶어’라고 옮기면 재회에 대한 바람이 앞에 나온다. ‘외로워’라고 하면 말하는 사람의 고독이, ‘그리워’라고 하면 애정이나 상실감이 깊어진다. 어느 쪽을 골라도 무언가는 잘 전해지고, 그 대신 다른 무언가는 멀어진다.
『조용한 미국인』의 문장도 마찬가지다. ‘술김에 결혼한다’고 옮기면 원문의 비유는 남지만 헬렌이 파울러를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은 일본어에서 약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아무하고나’를 더하면 그녀의 불신은 분명해지지만 독자가 스스로 알아차릴 여지는 줄어든다.
물론 관용 표현을 잘못 이해하거나 원문에 없는 뜻을 지나치게 보탠 것까지 모두 ‘해석’으로 넘길 수는 없다. 그래도 문학의 언어는 사전적인 뜻만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인물이 다른 언어 안에서 다시 말하게 하려면 어순도, 목소리의 결도, 감정을 얼마나 드러낼지도 새로 골라야 한다.